김섭(金涉)

호는 소정(疏亭), 아버지는 고려때 정당문학(政堂文學)겸 성균악정(成均樂正)을 지낸 김거익(金居翼)이다.  조선조 태조 5년(1396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제학(提學)의 벼슬에 올랐다.

김미(金湄)

퇴암(退庵 諱 居翼)의 넷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직제학(直提學 정3품)을 지냈다.

김숙량(金叔良)

석포(石圃 諱 路)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해 당진감무(唐津監務)를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김숙검(金叔儉)

호는 괴정(槐亭)으로 아버지는 사농경 김로(金路)이며 태종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다.

김양중(金養中)

남파(南坡 諱 光富)의 손자이며 숙온(叔溫)의 둘째 아들로 조선조 12대 인종왕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외증조.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 종5품)으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어 판교(判校 정3품)를 지냈다.

김명중(金命中)

석포(石圃 諱 路)의 손자이며 동헌(桐軒 諱 叔良)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제용감정(濟用監正)을지냈다.

김자중(金自中)

석포(石圃 諱 路)의 손자이며 叔良의 셋째 아들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과 오위(五衛)의 司直을 거쳐 호군(護軍 정4품)을 지냈으며 건공장군(建功將軍 종3품)의 품계를 받았다.

김남보(金南寶)

충의공(忠毅公 諱 龍珠)의 6대손으로 고려조 판도판서(判圖判書 정3품)를 지냈으며 조선조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이조판서(吏曹判書)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에 증직되었다.

김한계(金漢啓)

자는 형운(亨運)이며 호는 휴계(休溪)로 아버지는 현감 김영명(金永命)이다.

세종 무오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현관을 거쳐 집현전사·승문원사를 지냈다.

記注官으로 있을 때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 하였다.

김한철(金漢哲)

 

자는 자명(子明)이며 호는 송호(松湖)로 아버지는 현감 김영명(金永命)이다. 예종 기축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 현관을 거쳐 예조정랑을 지내고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낙향하였다.

김축(金軸)

소정(疎亭) 諱 涉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정3품)을 지냈다.

김경조(金敬祖)

渡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고 안동대도호부사, 전라도 관찰사(종2품),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성균관대사성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김자한(金自漢)

둔번(遁煩 諱 乙邦)의 손자이며 軸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 정3품)을 지냈다.

김한경(金漢卿)

자는 국보(國寶)이며 호는 도곡(道谷)으로 아버지는 사직 김자중(金自中)이다.

무과로 출사하여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내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김전(金전)

자는 사앙(士仰)이며 호는 송정(松亭)으로 아버지는 부사(府使) 김안중(金安中)이다.

생원으로 출사하여 성종 계묘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宗簿寺)·홍문관 제학을 지냈다.

김흠조(金欽祖)

자는 경숙(敬叔)이며 호는 낙금당(樂琴堂)으로 아버지는 첨정 김효우(金孝友)이다.

연산 신유 문과에 급제하여 장례원(掌隷院) 판결사를 지냈다.

김통(金統)

호지(好智)의 둘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校理, 正言등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을 지냈다. 증손 모재(慕齋)가 귀하게 되어 예조참판과 양관제학에 증직되었다.

김사언(金士彦)

치재(恥齋 諱 玧)의 아들로 號는 반학당(伴鶴堂)이다. 만년에 문과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시독관(侍讀官), 기주관(記注官)등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김세우(金世瑀)

자는 공근(公瑾)이며 호는 약재(約齋)로 아버지는 참군 김정(金整)이다.

연산 신유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김윤석(金潤石)

낙금당(樂琴堂 諱 欽祖)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侍講院)사서(司書)를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과 사헌부 지평, 장령(종4품)을 지냈다.

김익령(金益齡)

統의 맏아들로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사성(司成 종3품)을 지냈다.

그 뒤 사옹원(司饔院) 정(正 정3품)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다. 사후 이조판서겸 양관대제학에 증직되었다.

김관석(金關石)

자는 의중(倚中)이며 호는 사우당(四友堂)으로 아버지는 장사랑 김윤적(金允迪)이다.

공은 효성스러운 천성에 덕을 갖추었으며 학문에 정진하여 경향(京鄕)에 칭송되더니 사후에 덕천서원(德泉書院)에 배향되었다. 처음으로 倫洞에 터를 잡았다.

김제민(金齊閔)

자는 사효(士孝)이며 호는 오봉(鰲峯)으로 아버지는 증형조판서 김호(金顥)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선조 계유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동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임란을 당하매 아들 엽(曄)·섬(暹)·안(晏)·흔(昕)을 거느리고 역전하여 다대한 전과를 거둔 호남 삼대 창의장(倡義將)으로 이름을 남겼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강(忠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김민국(金敏國)

자는 화여(和汝)이며 호는 만회(晩檜)로 아버지는 부제학 김치중(金致重)이다.

공은 천성이 어질고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출사하여 관이 승지에 이르렀다가 대북파(大北派)의 폐모론을 배척하여 벼슬을 버리고 제주도로 낙향·은둔하였다.

김안국(金安國)

자는 국경(國卿)이며 호는 모재(慕齋)로 아버지는 증좌찬성 김연(金璉)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연산 계해 별시와 정묘 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지평·장령·예조참의·경상관찰사를 지내며 실학(實學)과 권선(勸善)·풍속순화와 사문진작(斯文振作)에 힘썼다.

전라관찰사로 재임할 때 사화로 파직되어 여주로 낙향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중종 정유 서환되어 삼조(三曹)의 판서·양관 대제학·의정부좌찬성·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냈다.

사후에 문경(文敬)이라 시호하고 인종묘정(仁宗廟廷)에 배향되고 오산(鰲山)·임강(臨江)·기천(沂川)·빙계(氷溪)·설봉서원(雪峰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정국(金正國)

자는 국필(國弼)이며 호는 사재(思齋)이고 아버지는 증좌찬성 김연(金璉)으로 모재 김안국의 아우이다. 김굉필의 문인으로 중종 기사 별시 갑과에 장원으로 등제하여 교리·정랑 등을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직제학·동부승지에 오르고 황해관찰사를 지냈다. 기묘사화로 고양(高陽)으로 낙향했다가 복직되어 병조참의·공조참판·경상관찰사·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사후에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을 추증하고 문목(文穆)이라 시호를 내리고 오산(鰲山)·임강(臨江)·문봉서원(文峯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진(金璡)

자는 형중(瀅仲)이며 호는 청계(靑溪)로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김예범(金禮範)이다. 중종 을유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가 성균관 생원으로 학업을 닦다가 뜻하는 바 있어 향리인 안동(安東)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자질(子姪)들을 충효로 훈육하여 세아들은 대과로 두 아들은 소과로 등제한 오현자(五賢子)를 길러내어 경세에 몰두한 경략가 였다. 후일 아들들이 귀히되어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주벽으로 모셨다.

김희삼(金希參)

자는 사로(師魯)이며 호는 칠봉(七峯)으로 아버지는 증승지 김치정(金致精)이다.

중종 경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수찬·부교리를 거쳐 양조 정랑 의정부사인을 지내고 삼척부사(三陟府使)를 끝으로 물러났다.

청렴한 학자로 이황(李滉)·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등과 교우하며 사현자(四賢子)를 훈육하여 후일 넷째 아들 동강(東岡) 우옹(宇옹)이 귀히되어 이조판서를 추증받았다.

김담수(金聃壽)

자는 태수(台수)이며 호는 서계(西溪)로 아버지는 참봉 김관석(金關石)이다.

황준량(黃俊良)·조식(曺植)·이문건(李文楗)에게 수학하고 명종 갑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뜻이 없어 경전을 탐독하고 현우(賢友)와 학문으로 교우하여 사후에 청천(晴川)·낙암서원(洛암書院)에 배향되었다.

김극일(金克一)

자는 백순(伯純)이며 호는 약봉(藥峯)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명종 병오 문과에 급제하여 내자시정을 지내고 후일 사빈서원(泗濱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여부(金汝孚)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의 아들로 중종 기유에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전한을 지냈다.

김우홍(金宇弘)

자는 면부(勉夫)이며 호는 이계(伊溪) 또는 지족당(知足堂)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중종 계축 문과에 급제하고 나주목사·영흥목사를 지냈다.

김우굉(金宇宏)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개암(開巖)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에게 배우고 중종 병인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대사성을 거쳐 관찰사를 지냈으며 후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우옹(金宇옹)

자는 숙부(肅夫)이며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直峰)으로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다.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중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양관제학·이조참판·대사성·대사헌을 지낸 임난(壬亂)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사후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을 추증받고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청천·회령서원(會寧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성일(金誠一)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峯)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다.

이황(李滉)의 학지요체(學之要諦)를 득심(得心)한 학자로서 선조 무진 문과에 급제하고 삼조낭관,대사성,부제학,부승지,형조참의,경상병사,경상좌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역임하였다.

임난(壬亂)에 유공하여 선무원종공신일등에 녹훈되어 이조판서 의금부사 춘추관사 오위도총관 양관대제학을 추증받고 시호는 문충(文忠)이 내려졌으며 임천(臨川)·호계(虎溪)·사빈서원(泗濱書院)등에 배향되었다.

김복일(金復一)

자는 계순(季純)이며 호는 남악(南嶽)으로 아버지는 증이판 김진(金璡)이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아우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경오 문과에 급제하고 삼조낭관을 거쳐 울산군수·창원도호부사 성균사성을 지냈으며 종부시정으로 추증되고 사빈(泗濱)·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정룡(金廷龍)

자는 시현(時見)이며 호는 월담(月潭)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담수(金聃壽)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선조 을유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박사를 거쳐 예안현감으로 군량미 수송에 공을 세웠으며 양조좌랑을 비롯하여 영월·풍기군수와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낙암서원(洛암書院)에 배향되었다.

김택룡(金澤龍)

자는 시보(施普)이며 호는 조성당(操省堂)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양진(金楊震)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선조 무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현관을 거쳐 헌납을 지냈다.

김지수(金地粹)

 자는 거비(去非)이며 호는 태천(苔川) 또는 천태산인(天台山人)으로 아버지는 증병참 김서(金曙)이며 할아버지는 충강공(忠剛公) 김제민(金齊閔)이다.

 광해   병진 문과에 급제하고 교서판교감이 되고 폐모론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양조낭관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종성부사를 끝으로 고부로 낙향하였다. 고매한 인품으로 명망을 얻어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며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지남(金地南)

 자는 대뢰(大賚)이며 호는 구봉(九峯)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성(金晟)이다.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관계진출을 단념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공조좌랑에 올랐으며 인조 무인에 무과에 급제하고 기사관·삼조좌랑·무장현감을 거쳐 직장·지평을 지냈다.

김용(金涌)

자는 도원(道源)이며 호는 운천(雲川)으로 아버지는 찰방 김수일(金守一)이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이다.

 숙부 김성일에게서 학문을 닦고 선조 경술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검열이 되었다가 물러났다.

 임란(壬亂)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수성(守城)하고 행재소에 가서 호가(扈駕)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환도하여 삼사·양조 현관을 지내고 예천군수·선산부사·여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김주(金주)

자는 여정(汝定)이며 호는 불구당(不求堂)으로 아버지는 도사 김극계(金克繼)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인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여 무장현감·정랑·양산군수 겸 경주병마절제사를 지냈다. 義城金氏 世譜庚寅, 丙申譜 편찬을 주관하고 그 서문을 썼다.

김욱(金頊)

자는 신백(愼伯)이며 호는 사월당(沙月堂)으로 아버지는 감찰 김효가(金孝可)이고 할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옹)이다.

인조 갑자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과 흥해·서산군수 그리고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김시주(金是柱)

자는 이립(以立)이며 호는 개호(開湖)로 아버지는 병조참의 김용(金涌)이다. 광해조 계축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을 지냈다.

김시권(金是權)

자는 자중(子中)이며 호는 봉파(鳳坡)로 아버지는 익위사(翊衛司) 김집(金潗)이다. 숙종조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냈다.

김시영(金是榮)

자는 인여(仁汝)이며 호는 청음(淸陰)으로 아버지는 김즙(金즙)이다.

효종 정유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기주관. 성균관직강. 예조정랑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김창석(金昌錫)

자는 천여(天與)이며 호는 월탄(月灘)으로 아버지는 호군동추를 지낸 김이기(金履基)이다. 숙종조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문집이 있다.

김세호(金世鎬)

자는 경백(京伯)이며 호는 구주(龜洲)로 아버지는 호군(護軍)을 지낸 김익기(金益基)이다. 숙종조 경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들었으며 문집이 있다.

김덕제(金德濟)

자는 경언(經彦)이며 아버지는 부호군 김호(金鎬)이다.

숙종 을묘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만경현령을 지냈다.

김빈(金빈)

자는 빈여(賓如)이며 호는 갈천(葛川)으로 아버지는 김시각(金是각)이다.

효종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외직으로 경주부사 광주목사, 한성좌우윤, 내직으로는 도승지, 예조참판을 비롯 사조의 참판을 지냈고 기로연에도 참여하였다.

김방걸(金邦杰)

자는 사흥(士興)이며 호는 지촌(芝村)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시온(金是온)이다.

현종 경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김극령(金極齡)

자는 남로(南老)이며 아버지는 통덕랑 김이표(金爾標)이다.                     

영조 기유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 황해도사. 춘추관기주관. 병조좌랑을 거쳐 운산군수를 지냈다.

김학배(金學培)

자는 천휴(天休)이며 호는 금옹(錦翁)으로 아버지는 김암(金암)이다.

현종 계묘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좌랑을 거쳐 현령을 지냈다

김성구(金聲久)

자는 덕휴(德休)이며 호는 팔오헌(八吾軒)으로 아버지는 증이참 김추길(金秋吉)이다.

현종 기유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와 집의를 하고 병조참의 여주,홍주 목사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성균관 대사성도 지냈다.

김여건(金汝鍵)

자는 천개(天開)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김성구(金聲久)이다.

숙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관을 거쳐 수찬을 지냈다.

김세흠(金世欽)

자는 천약(天若)이며 호는 칠탄(七灘)으로 아버지는 주부 김태기(金泰基)이다.

숙종 정묘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김성탁(金聖鐸)

자는 진백(振伯)이며 호는 제산(霽山)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김태중(金泰重)이다.

숙종 신묘 진사로 출사하여 을묘 문과에 급제하고 부수찬. 지평을 거쳐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김응렴(金應濂)

자는 성희(聖希)이며 아버지는 김이도(金以鍍)이다. 영조 경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김택수(金宅洙)

자는 도원(道元)이며 호는 휴촌(休村)으로 아버지는 증호참 김재령(金再齡)이다.

영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고 좌우승지. 돈영도정을 거쳐 호조참판을 지냈다.

김한로(金漢老)

자는 상수(商수)이며 호는 성와(省窩)로 아버지는 첨추 김치복(金致福)이다.

영조 신유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집의를 지냈다.

김굉(金굉)

자는 자야(子野)이며 호는 귀와(龜窩)로 아버지는 증이참 김광헌(金光憲)이다.

이상정(李象靖)에게 수학하고 생원으로 출사하여 정조 정유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현관을 거쳐 예조참판을 지냈다.

김한동(金翰東)

자는 한지(翰之)이며 호는 와은(臥隱)으로 아버지는 좌랑 김경필(金景泌)이다.

진사로 출사하여 정조 기유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현관을 거쳐 관찰사를 지냈다.

김직(金直)

자는 경지(敬之)이며 호는 지애(芝厓)로 아버지는 김광호(金光鎬)이다.

정조 임자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냈다.

김서(金瑞)

자는 맹집(孟輯)이며 호는 응암(鷹岩)으로 아버지는 김정신(金鼎臣)이다.

순조 기묘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김이상(金履常)

자는 무숙(懋叔)이며 호는 수와(睡窩)로 아버지는 생원 김국채(金國采)이다.

영조 을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김기찬(金驥燦)

자는 덕여(德汝)이며 호는 동곽(東郭)으로 아버지는 김주훈(金柱勳)이다.

정조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김희락(金熙洛)

자는 숙명(淑明)이며 호는 식헌(寔軒)으로 아버지는 증참의 김두동(金斗東)이다.

이상정(李象靖)에게 배우고 생원으로 출사하여 지평. 군수를 지냈다.

김희주(金熙周)

자는 공목(公穆)이며 호는 갈천(葛川)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시동(金始東)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으로 정조 을묘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 안악. 안주. 영흥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지냈다.

김낙풍(金樂풍)

자는 적여(績汝)이며 호는 삼낙재(三樂齋)로 아버지는 첨지중추 김성(金珹)이다.

순조 을해 평안도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내외 현직을 거쳐 병조참의를 지냈다.

김희직(金熙稷)

자는 공숙(公叔)이며 호는 표림(豹林)으로 아버지는 김호동(金虎東)이다.

정유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김두명(金斗明)

자는 백원(伯圓)이며 호는 낙천와(樂天窩)로 아버지는 생원 김희용(金熙鏞)이다.

순조 을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김여서(金驪書)

자는 중연(仲淵)이며 호는 담운(淡雲)으로 아버지는 생원 김희질(金熙質)이다.

순조 정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현관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김규서(金奎瑞)

자는 국서(國瑞)이며 아버지는 첨추 김유성(金維城)이다.

순조 정해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부승지를 지냈다.

김건수(金建銖)

자는 공립(公立)이며 호는 만회(晩悔)로 아버지는 첨추 김재인(金在仁)이다.

순조 경인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거쳐 승지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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