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城金氏 重要 世居地 變遷

'乙丑譜'에 의하면, 9세 金龍庇 이래로 貫鄕인 경북 義城을 世葬之地로 삼아왔으므로 일찍이 義城에 터를 잡아 세거했다고 믿어진다.

金龍庇의 맏아들 金宜의 자손들인 僕射公派는 13세 金居斗. 金居翼의 대에 安東. 扶餘. 淸原의 文義 등지로 가 자리잡았고, 다시 15세 金晋. 金源의 대부터 3代에 걸쳐 軍威. 水原. 高敞의 興德. 靑陽의 定山. 金海. 保寧의 藍浦. 永川의 斗峽 등으로 散居해갔다.

그 가운데 13세 金得水가 北靑의 蛇洞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으므로 그의 後系가 北靑에 세거했고, 16세 金傳顯(居翼의 曾孫)의 부인 慶州崔氏가 세아들과 함께 古阜의 道溪里로 옮겨간 뒤 古阜를 비롯한 井邑에도 일부 자손들이 뿌리를 내렸던 것 같다.

또한 16세 金義同이 長沙로 유배되어 그 자손들이 高敞 일대에 터를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金宜의 아우 金紘의 자손들인 府院君派는 金紘의 증손 金河. 金漢. 金浩의 대에 長城. 康津. 海南. 光州 등지에 자리잡았고, 일부는 14세 金繼環 이래로 황해도 信川의 文化 등지에, 17세 金國璡 이래로 忠州. 海州 등지로 가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金龍庇 의 셋째 아들이며 金紘의 아우 金英의 자손들인 贊成事公派는 일부가 13세 金用超의 대부터 星州에 정착. 세거했고, 일부는 高靈으로 가 살았다. 또한 16세 金漢卿의 대부터 3대에 걸쳐 靑松. 槐山. 陜川. 慶州. 全州등지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한편 9세 金龍弼의 아들 金允寬의 자손들인 御史公派는 평남 平壤을 거쳐 16세 金經의 대 이래로 龍岡에서 살았고 9세 金龍珠의 자손들은 開城에서 살다가 15세 金南寶 이래로 충북 沃川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9세 金成丹의 자손들은 先代부터 세거해온 義城에 많이 살았으며, 9세 金興의 자손들인 宣略將軍公派는 綾州를 거쳐 陜川에 가 살았다.

1930년 당시 義城金氏는 경기도 安城郡. 長湍郡 일원, 충북 沃川郡 伊院面, 槐山郡, 陰城郡 陰城邑, 충남 瑞山郡 遠北面 일원, 전북 井邑郡 德川面. 梨坪面 일원, 경북 軍威郡, 義城郡 丹村面. 舍谷面등지, 安東郡 臨河面. 一 直面. 西後面, 靑松郡 縣西面. 眞寶面, 永川郡 北安面일원, 榮豊郡 長壽面, 奉化郡 奉化面, 醴泉郡 醴泉邑, 星州郡일원, 경남 晋陽郡, 陜川郡, 평남 龍岡郡 吾新面, 龍岡面, 평북 泰川郡 西面, 함남 利原郡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義城金氏 代表的 人物 槪略

 

義城金氏는 신라 경순왕의 제4子로 義城君에 봉해진 金錫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시조 金錫은 경순왕의 4子설과 5子설이 있으나 義城金氏 世譜인 丙申譜(1656)이후 수차의 족보간행시에 문중의 석학거유가 한결같이 4子설을 따랐으며 또 경주김씨 계림군파 창세보, 언양김씨 정해보, 선산김씨 기축보 등에서도 4子설을 따랐으니 이를 부정할 명확한 증거가 없이는 선조의 뜻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義城金氏의 인물로 고려. 조선조에 걸쳐 君에 책봉된 이는 시조 義城君 金錫을 비롯하여 7명이고 시호를 받은 사람은 忠毅 金龍珠 등 11명이다.

그 후대에서 역사에 이름 있는 인물은 석학. 문장가였던 金安國을 비롯하여 金正國. 金誠一. 金宇옹. 金齊閔이 있고, 구한말 망국 이후는 金道和. 金河洛 등 의병장과 金東三. 金昌淑 같은 志士들을 낳았다.

義城金氏에서는 조선조에 95명의 문과 급제자를 내었는데, 이는 慶州金氏. 光山金氏. 延安金氏. 金海金氏. 淸風金氏 다음으로 많은 수다.

義城金氏의 분파는 9세조를 分派祖로 하여 5개파로 나누어진다. 金龍庇의 후손이 詹事公派, 金龍弼의 후손이 守司空公派, 金龍珠의 후손이 忠毅公派 ,金成丹의 후손이 贊成事公派, 金興의 후손이 宣略將軍公派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義城縣 人物條에 실린 고려초의 인물로 金弘術이 있다. 그는 신라말 眞寶城 將軍으로 있다가 고려 태조에 귀의하고 승격된 義城府의 城主가 된 인물이다.

金龍庇는 벼슬이 고려금자광록대부태자첨사이며 의성군에 봉해졌다. 의성군민에게 크게 공덕이 있어 군민들이 鎭民祠를 세워 제향하였는데 후손들이 오토산묘하에 오토제와 진민사를 이건하고 춘추로 제향하는 의성김씨의 中祖이다.

太子詹事 金龍庇의 증손 金台權은 左司尹을 지냈다. 그의 아들 金居斗는 工曹典書를 지냈고 始居安東하였으며 '三國史記' 重刊本의 跋文을 쓸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金居翼은 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조선개국 후 우의정을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했다.

金光富는 金龍庇의 셋째 아들 金英의 손자로 우왕5년 嶺南巡問使 兼 合浦都元師로서 침입한 왜구와 싸우다가 嘉樹縣 有麟西亭에서 전사, 兵曹判書. 純誠輔理功臣으로 추증 되었다.

贊成公派의 파조가 되는 金成丹은 門下贊成事에 올랐다.

金用超는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무예에도 뛰어났다.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워 鄭道傳 등 15명과 함께 공훈에 따라 벼슬을 받았다. 조선개국 후 湖南兵馬都節制使를 제수받고 原從功臣에 봉해졌다.

金英烈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兵曹參判에 이르렀다. 朴苞의 亂 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義城金氏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며 조선 인종묘정에 배향된 慕齋 金安國은 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燕山君7년 생원. 진사 兩試에 합격하고, 2년 뒤 別試文科에 급제했다. 士林의 대표적인 인물로 全羅道觀察使로 있다가 己卯士禍 때 대사헌 趙光祖의 일파라는 이유로 파직 되기도 했다. 관직은 大司憲, 大司諫, 禮曹. 兵曹의 판서, 兩館大提學, 左贊成, 判中樞府事, 世子貳師 등을 역임했다.

金安國은 성리학 뿐 아니라 천문. 병법. 국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童蒙先習', '慕齋集', '慕齋家訓' 등의 저서와 '二倫行實', '瘡疹方' 등의 편저서를 남겼다. 趙光祖와 같이 至治主義를 주장했으나 ,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그의 문하에서 河西 金麟厚, 眉菴 柳希春 등이 배출되었다.

그의 동생인 金正國 역시 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중종 4년 문과에 급제, 湖堂에 뽑혔고 黃海道.慶尙道觀察使를 거쳐 兵曹,刑曹參判을 지냈다. 己卯士禍때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다가 다시 기용되어 禮曹參判을 지냈다. 저서에는 '性理大全節要', '歷代授受承統之圖', '村家救急方', '己卯黨籍','思齋集' 등이있다.

金璡은 司馬試에 합격한 후 벼슬을단념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길렀으며 높은 德과 삶의 경영을 통해 川前門戶의 터전을 닦았다. 아들 5형제중 克一, 誠一, 復一은 大科에 守一,明一은 小科에 급제하여 世稱 5龍집으로 칭송되었고 뒷날 吏曺判書에 추증되었다.

金希參은 문과에 급제하고 翰林. 檢詳. 舍人을 거쳐 三陟府使를 지냈는데, 아들 넷중 宇弘, 宇宏, 宇옹 3형제가 문과에 올라, 4부자가 대과에 오른 유일한 義城金氏 집안이 되었다.

金居翼의 7세손 金齊閔은 一齋 李恒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선조 때 문과에 급제, 郡守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의병대장으로 출전,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 네 아들 중 晏은 전쟁터에서 숨졌고, 曄. 昕. 暹. 3형제는 아버지를 도와 군량미를 조달, 해로를 통해 행재소까지 보내기도 했다.

金誠一은 退溪李滉의 道統을 이어받은 嫡傳이다. 일찍이 文科에 급제하여 湖堂에 뽑히기도 했고 大司成, 副提學등에 오르기도 했으며 日本通信副使로서는 王命을 받든 신하로서 체모와 언행이 당당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경상우도 관찰사겸 순찰사가되어 왜적과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殉死하였고 뒷날 文忠의 시호가 내렸다.

金宇옹은 李滉. 曹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명종 22년 문과에 급제, 大司成을 거쳐 安東府使를 지냈다. 鄭汝立의 옥사 때 그와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續綱目' 20권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풀려나 副護軍으로 '備禦機務' 7條를 건의했고, 그 후 吏. 禮. 兵曹參判, 漢城左尹을 역임했다.

金涌은 선조 때 과거에 급제, 檢閱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했다. 임진왜란 때 安東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항쟁, 이듬해 行在所에 가서 吏曹佐郞 등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1598년 領議政 柳成龍이 削職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散官. 善山府使 등 外職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 太常寺正으로 編修官이 되어 '宣祖實錄' 修撰에 참여했다.

金地粹는 광해군 때 폐모론에 반대해 富寧으로 귀양갔다가 仁祖反正으로 풀려나 禮. 兵曹의 郞官을 지냈다. '朝天錄'은 인조 4년 正使 金尙憲을 따라 서장관으로 明나라에 가면서 지은 시들을 묶은 것이다.

金賓은 南獄 金復一의 증손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요직을 두루거친 명신이다. 외직으로는 경주부사, 광주, 나주목사, 한성좌우윤을, 내직으로는 도승지, 예조참판을 비롯 4조의 참판을 지냈고 기로연에도 참여한 의성김씨의 대표적 관료이다.

金聲久는 副提學 金宇宏의 후손으로 持平. 正言. 大司成을 거쳐 江原道관찰사를 지냈는데, 후손에서 문과급제자가 17명이 나왔다.

金邦杰은 弘文館 修撰으로 있을 때 服制문제를 거론한 '己巳疏'를 올려 尤庵 宋時烈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承旨. 大司成. 大司諫등을 지냈으나 西人이 집권하게 되자, 宋時烈을 탄핵했던 죄로 전라도 동복으로 귀양 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校理 金聖鐸의 아들 金樂行은 鄕試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귀양가게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귀양지로 따라가 10여 년간 모신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효자로 이름이 있었다.

金굉은 大山 李象靖의 문인으로 정조 1년 문과에 급제, 典籍. 持平. 丹陽郡守. 禮曹參判 등을 지냈다. 명필. 명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丹陽郡守 때 吏屬들의 時弊를 논한 萬言疏가 명문으로 꼽히고, 중요한 외교문서를 많이 썼다.

金翰東은 관찰사 金聲久의 증손으로 정조 때 문과에 급제, 觀察使. 承旨. 大司憲을 역임했으며, 순조 때는 천주교도로 몰려 유배되기도 했었다.

義城金氏의 후손에서 구한말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지사.열사.의사는 단일성씨 중에서 가장 많으니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金興洛은 鶴峯 金誠一의 11代胄孫이며 韓末의 대학자로서 退溪學의 연원을 이은 당대의 儒宗이다. 나라에서 右副承지 영해부사등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여 707명의 門人을 배출했다. 또 日帝의 침략에 항거하여 安東甲午義兵, 乙未義兵, 丙申義兵을 총지휘한 애국지사였으니 뒷날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제자들 중에서도 독맂유공훈장을 받은 이가 60여명이나 되었다.

金道和는 을미사변 직후 郭鍾錫. 金興洛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제천의 柳麟錫. 徐相說 등과 연합전선을 펴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학문에 뛰어났는데 한일합방 후 일본 총독부에서 斯文진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우대, 식민통치에 이용하려 했으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이때 그를 찾아왔던 高橋亨은 집 대문에 '合邦大反對之家'라는 글씨를 써붙이고 돌아갔다고 한다.

金河洛도 을미사변 때 창의하여 雲峴. 노루목. 梨峴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남한산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뒤에 盈德 五十川 전투에서 순국했다. 그의 '征討일기'는 당시 의병활동의 기록이다.

金東三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李始榮. 李東寧 등과 耕學社를 조직했고, 李儁. 呂準 등과는 扶民團을 결성 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臨政 노동국 총판이 되기도 하고, 또 여러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統義府를 조직, 총장이 되었다. 1925년 正義府를 조직, 행정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日警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麻浦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心山 金昌淑은 儒林으로 일제시대 반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애국자요 사학자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賣國五賊請斬疏'를 올렸고, 1908년 친일단체인 一進會를 비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전국 유림 대표 1백 37명의 명의로 '한국독립청원서'를 작성, 이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기 위해 上海로 갔었으며, 그곳에서 임정에 참여,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다음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제 1차 儒林團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출옥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 '天鼓'의 발행에 이어 朴殷植등과 '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孫文과 교섭, 독립운동 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上海 주재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 중 모진 고문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어 버렸다.

8·15광복 후 儒道會를 설립, 초대 회장을 지냈고, 초대 成均館 관장과 成均館大 학장을 지냈다. 6·25 사변 때 피난지 부산에서 李承晩대통령에게 하야 경고문을 보냈다가 40일간 옥고를 치렀고 李始榮. 金性洙. 趙炳玉 등과 '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金朋濬은 龍岡에서 출생하여 普成中學, 上海法政大學을 졸업하였고 三一運動을 창도한 후 상해로 망명하여 臨時政府수립에 참여하였으며 臨時議政院 15대 의장,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해방후에는 헌법기초위원장에 피선되었고 金九, 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하였으나 6.25때 납북되었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일가족 7명이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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